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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핔 : 봄호수 선생님 소식입니다.
가입 : 31 Aug. 2017
우편 : 61
2018-01-23 15:03:39 | 조회 (27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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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소식을 접한게 아니라 민족통신에서 소개된 글입니다.

많은 어려움속에서도 글을 꾸준히 써오신 봄호수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건강 잃지마시고 몸조리 잘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민족통신에서 소개한 글>

[카나다 심방] 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1-22 20:54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6

 

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은 미시건서 택시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카나다 국경지역의 카나다 영토에 있는 윈소(Windsor)에서 1월20일 오후1시45분 급행열차로 4시간 달려 토요일인 1월20일 오후6시께 토론토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냈다.

벵쿠버에서 살던 김태정선생이 암투병을 하며 토론토에서 지내던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몬트리얼로 떠나는 열차 대합실에서 아픈몸을 이끌고 휠체어까지 싣고 역전, 버스터미널에 나와 뜨거운 마음으로 맞이해 주는 김태정선생을 잊을 수 없다. 토론토에서의 귀중한 한시간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진]오른쪽의 김태정선생과 취재한 기자

 

[카나다 심방]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토론토=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 미시건서 택시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카나다 국경지역의 카나다 영토에 있는 윈소(Windsor)에서 급행열차로 4시간 달려 토론토로 향했다. 토요일인1월20일 오후6시께 토론토에 도착했다.

 

토론토 역전 앞에는 김태정선생과 그의 아들, 그리고 김수해선생의 부탁을 받고 마중나온 김창준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역전 앞에서 차를 타고 몬트리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버스터미널로 옮겨 여기에서 이들과 한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사실은 김태정 선생을 모시고 함께 몬트리얼로 가려고 예정하였으나 그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벵쿠버에서 토론토 아들집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김태정 선생의 암투병 생활은 계속되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자신도 안타까와 했고, 그의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도 마찬가지로 염려했다.

기자는 전순영여사와 정학필선생도 만나려고 예정하였으나 전여사는 하와이 딸집으로 여행중이었고, 그리고 정학필선생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수해선생 부탁으로 역전에 나온 김창준선생(77)은 기자가 평양취재 기간 멀리서 본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반갑게 맞이 하여 주었다. 그는 한양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지난 1999년 카나다로 이민왔다.자신은 1951년 전쟁시기에 단신으로 남녘으로 내려와 생활하다가 고향이 가족들이 너무 그리워 북부조국을 방문하기 위해 카나다로 이민왔었다고 고백했다. 고향이 평남 순천인 김창준선생은 2003년, 2004년, 2005년은 부인과 함께 세차례 고향방문을 다녀왔고, 2010년, 2014년, 2015년 세차례는 혼자서 고향방문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에는 못가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토론토 역전에서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짦은 만남을 가질수 있었던 김태정선생(86)은 추위를 무릎쓰고 아들과 함께 유니온역전에 나와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고, 그리고 버스역까지 함께 가면서 한시간 가량 대화를 나눌수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는 외부출입이 힘든 건강상태에서도 아들이 부축하여 자동차에 윌체어(Wheel Chair)를 싣고 역전에 마중나와서 대화를 주고 받았고, 몬트리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까지 배웅해 주며 친절을 베풀어 준 김태정선생의 따뜻한 사랑은 잊을수 없었다. 대화중 한마디 한마디에 묻혀있는 나라사랑,애국심은 용광로의 끓는 쇳물같이 뜨꺼웠다.

 

그는 건강때문에 그토록 그리워해 온 북녘 땅을 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그는 무척 사람을 그리워했다. 거동하기조차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운 날씨에 역전앞에 나와 기자와의 짧은 만남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김태정선생, 그의 아들, 그리고 김창준선생과 토론토에서 만나 짧은 대화라도 나눌수 있었던 것은 먼길을 달려온 기자로서는 다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8시반에 떠나는 몬트리얼행 버스에 올라 새벽2시30분에 도착하는 7시간 동안 버스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특히 김태정선생도 “이렇게 만난것만 하여도 다행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여건이 여의치 못해 집으로 함께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몬트리얼로 함께 여행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여러차례 하기도 했다. 기자는 이곳으로 오기전 김태정선생이 벵쿠버에 거주할때 1천5백마일 거리였지만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여 2차례나 심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들이 남달랐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이며 이민생활 전 기간을 나라사랑, 민족사랑으로 한생을 보내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김태정선생은 북부조국 바로알리기 운동선구자

 

김태정선생은 카나다의 통일운동가 (고)강원진 선생과 함께하면서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는 특히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인터네트 활동을 통해 북부조국 바로알리기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블러그 등 북녘사회 바로알리기 운동을 벌이다가 이명박 정부당국에 의해 다섯차례나 블러그 및 홈페지가 폐쇄당해야 했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은 미국이나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얼굴이 간지러울 정도로 아첨하면서 제 동족이며 통일을 해야 할 대상인 이북에 대해서는 전례없는 적대시정책으로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지적해 왔다

 

남녘의 이명박 정권하의 국정원과 공안당국은 그 당시 김태정 선생(필명:봄호수)이 "지난 7년간 7만건의 북찬양 글을 인터넽에 올렸다"고 주장하며 그를 친북인사로 몰아 국내외 동포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악선전을 해왔다. 국정원은 또 봄호수가 한국에 있는 인터네트 사이트들을 이용하여 <종북카페>를 운영해 왔다고 발표하기도했다.

 

그는 이에 대해 "한국사회가 너무나 이북을 왜곡하고 중상모략하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바로 알리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고 답변하면서 "지난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 10년 동안 10만여개 이상의 북 바로알리기 글들을 한국 인터네트 공간을 이용하여 발표해 왔다"고 회상했다.

 

"8순이 넘은 나이인데 어떻게 인터네트를 통해 이북 바로알리기 운동에 참여하여 왔습니까?"라고 묻자 "인터네트 활동은 20여년이 넘었지만 사실 우리 민족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한지는 이미 65년전의 일"이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이미 14~5세에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빨치산 대장 신덕균의 외조카로 경북 청송에 있는 외가댁에서 빨치산 심부름꾼으로 참여한 추억들도 알려주었다.

 

김태정선생의 애국활동 역사

 

 

그는 1974년 카나다로 이민와서도 토론토 영사관 앞에서 피키트 들고 김대중 선생 구출운동을 시작하면서 이상철 목사, 김재준 목사, 민중신문 만들던 정철기 선생, 강원진 선생 등과 한국민주와운동에 적극참여해 왔다. 1980년 광주항쟁부터는 맥길대학이 제작한 광주필림을 구입하여 교육회관 등에서 상영하여 동포사회에 전두환 학살군사정권의 죄악을 폭로하는 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미국방문하여 로널드 레간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카나다 오따와에 들렸을 때 토론토에서 버스를 타고 40여명과 함께 먼곳을 가서 그의 방문일정을 가로막는 시위를 벌이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김태정 선생은 그 이후 중국길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이북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1981년 평양을 방문했다. 아버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지만 외삼촌 신덕균과 이모 신갑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소식은 빨치산 노병회상기에 아버지 존함과 같은 김만수 대원이 행군도중 졸라병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어 "1981년 부터1995년까지 다섯번 방북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오진우 무력부장과도 접견하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대에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회의들에도 참여했다. 헬싱키, 비엔나에서 열린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회의에도 4번이나 참여했고, 1990년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차 카나다대표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준비회의에 참여하여 북과 해외대표들이 사전회의를 한 모임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민족시인으로서도 활동했다. "비록 해외에 산다할지라도 나는 자주를 지키는 전사"라는 그의 시가 북에서 1993년 발간한 통일문학 17호(465쪽)에 게재되기도 했고, 그 이듬해인 1994년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을때 김태정 선생은 북미주조선친선협회 카나다지역본부 수석의장으로서 동포언론 신한민보와 이북언론에 조시를 발표한바 있었다.

 

김태정 선생은 암투병하기 이전시기에는 한때 한국의 블러그나 까페 5개를 운영하면서 통일관계, 남북관계 글들을 10만여 개 가량 올렸으나 한국정부 당국은 그것들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명목으로 그가 경영주로 활동하던 사이트들 5개를 폐쇄중단 조치까지 단행했다. 공안당국의 주장은 그 글들이 북찬양이라는 주장이었다. 다시말하면 북을 바로알리기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북을 있는대로 알린다면 현 한국정부의 입장이 난처해 진다는 말과도 같은 자세가 공안당국의 성격이었다.

 

“특히 이명박정권은 천하의 반민족세력”

 

이명박 정권이 폐쇄시킨 블로그 중 "봄호수 블로그"는 독자가 95만까지 되었는데 이것도 이명박 정권의 공안당국이 폐쇄시켰다고 폭로한 김태정 선생은 "특히 이명박 정권은 천하의 반민족 세력"이라고 규탄했다.

 

그는 카나다에 이민와서 처음 10년은 토론토지역에서, 그리고 그후 33년은 뱅쿠버지역에 거주하다가 최근에 다시 아들이 살고 있는 토론토지역으로 이사 왔다. 그는 뱅쿠버에 거주할 때에는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회유공작도 체험했고, 공갈협박, 고립압박같은 접근도 경험했다. 그는 그러나 "미군이 조국반도에 주둔하는 한 한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히면서"식민지 땅에는 발을 딛지 않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뱅쿠버에서 살면서 때로는 못된 한국정치인이 이곳에 와서 강연을 하는 경우에 그 장소에 직접가서 규탄하며 강연회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그 한 예가 김종필의 뱅쿠버 방문때였다. 그런가하면 김태정 선생 자신도 동포사회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내가 가게를 하며 꽃집을 경영할 때 어용인사들 40여명이 꽃도매상 앞에서 나를 둘러싸고 빨갱이 소동을 벌이며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카나다 정부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도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최홍희 장군과의 교제가 시작되면서 한층 더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카나다지역위원회에 대표로 활동하며 조직적인 통일운동에도 참여한바 있었다."고 말한다.

 

김태정 선생은 뱅쿠버까지 방문해 준 민족통신 특파원에게 "정말로 감사한다"면서 자신의 주위 분들을 급하게 연락하여 친교시간을 갖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기억도 떠올랐다. 그 때 기자는 김정일국방위원장 서거관련하여 방북취재하고 돌아와 현지상황을 설명해 준적도 있었다. 그당시 그 자리에는 6.15공동선언실천 카나다지역위원회 유동성 뱅쿠버 위원장을 포함하여 김신규 선생부부, 안태훈 선생 부부, 엄종순 여사(김태정 선생 부인) 등이 함께했다.

 

김태정 선생의 지난 시기 취미생활은 독특했다. 그는 건강했을 시기에는 수석(돌) 수집활동에도 취미를 갖고 있었다. 벵쿠버 그의 자택 1층, 2층, 그리고 정원 등에는 각종 희귀한 돌들이 전시되어 있단 것이 기억나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카나다 이민길에 오르기 전에 한국 덕수궁에서 돌전시회를 힐 정도로 돌수집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김태정 선생은 1932년 5월30일 경북 의성군 점곡에서 태어났다. 점곡국민학교와 점곡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미술학원에서 미술공부를 마치고 한 광고회사에서 삽화를 그리는 디자이너로 20여년 일하다가 취업이민으로 1974년 카나다로 왔다. 3남1녀을 둔 가장으로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여 지금 18명의 혈육들이 토론토와 뱅쿠버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끝) 

 

 


 
  1   
Re : 봄호수 선생님 소식입니다.
댓글 : #1
가입 : 28 Aug. 2013
우편 : 6220
2018-01-27 15:06:36
댓글 |  신고
이왕 올린 김에 수석에 심취해던 나의 취미 사진 일부와 가족사진을 올립니다.
 
고맙게도 노길남박사께서 먼길을 찾아 주셔서 과분한 글을 써 주시고 뜻밖에 대한미국육봉원님께서 그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금 깊은 감사드립니다.
 
그간 오랜 지병으로 많은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렸고 캐나다의 좋은 의료 혜택으로 큰 탈없이 생을 연명하게 되었음을 감사드리며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로서도 이제는 마지막 생의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부족하지만 영정사진을 준비한 것이 있기에 이를 정리하여 올릴까 하며 동시 그간 취미로 즐기든 수석사진들을 나의 인간면모의 일부로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여 여기에 올립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金晩秀 1911년 11월 7일생 ~ 노병의 회상기에 의하면 김만수대원이 1930년대 후반혹은 40년대초반 행군도중 전염(쫄라)병으로 희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음. (쫄라) 중국어 같음

 


 

어머니 申益伊 1908년 9월 1일 ~ 1990년 4월 19일

 

나 (봄호수) 金泰廷 1932년 5월 30일 ~ 호적에는 1932년 6월 25일

 

처 嚴鍾順 1940년 2월 10일 ~

 

 

2018-01-23 15:03:39 | 조회 (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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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소식을 접한게 아니라 민족통신에서 소개된 글입니다.

많은 어려움속에서도 글을 꾸준히 써오신 봄호수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건강 잃지마시고 몸조리 잘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민족통신에서 소개한 글>

[카나다 심방] 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1-22 20:54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6

 

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은 미시건서 택시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카나다 국경지역의 카나다 영토에 있는 윈소(Windsor)에서 1월20일 오후1시45분 급행열차로 4시간 달려 토요일인 1월20일 오후6시께 토론토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냈다.

벵쿠버에서 살던 김태정선생이 암투병을 하며 토론토에서 지내던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몬트리얼로 떠나는 열차 대합실에서 아픈몸을 이끌고 휠체어까지 싣고 역전, 버스터미널에 나와 뜨거운 마음으로 맞이해 주는 김태정선생을 잊을 수 없다. 토론토에서의 귀중한 한시간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진]오른쪽의 김태정선생과 취재한 기자

 

[카나다 심방]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토론토=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 미시건서 택시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카나다 국경지역의 카나다 영토에 있는 윈소(Windsor)에서 급행열차로 4시간 달려 토론토로 향했다. 토요일인1월20일 오후6시께 토론토에 도착했다.

 

토론토 역전 앞에는 김태정선생과 그의 아들, 그리고 김수해선생의 부탁을 받고 마중나온 김창준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역전 앞에서 차를 타고 몬트리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버스터미널로 옮겨 여기에서 이들과 한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사실은 김태정 선생을 모시고 함께 몬트리얼로 가려고 예정하였으나 그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벵쿠버에서 토론토 아들집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김태정 선생의 암투병 생활은 계속되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자신도 안타까와 했고, 그의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도 마찬가지로 염려했다.

기자는 전순영여사와 정학필선생도 만나려고 예정하였으나 전여사는 하와이 딸집으로 여행중이었고, 그리고 정학필선생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수해선생 부탁으로 역전에 나온 김창준선생(77)은 기자가 평양취재 기간 멀리서 본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반갑게 맞이 하여 주었다. 그는 한양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지난 1999년 카나다로 이민왔다.자신은 1951년 전쟁시기에 단신으로 남녘으로 내려와 생활하다가 고향이 가족들이 너무 그리워 북부조국을 방문하기 위해 카나다로 이민왔었다고 고백했다. 고향이 평남 순천인 김창준선생은 2003년, 2004년, 2005년은 부인과 함께 세차례 고향방문을 다녀왔고, 2010년, 2014년, 2015년 세차례는 혼자서 고향방문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에는 못가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토론토 역전에서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짦은 만남을 가질수 있었던 김태정선생(86)은 추위를 무릎쓰고 아들과 함께 유니온역전에 나와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고, 그리고 버스역까지 함께 가면서 한시간 가량 대화를 나눌수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는 외부출입이 힘든 건강상태에서도 아들이 부축하여 자동차에 윌체어(Wheel Chair)를 싣고 역전에 마중나와서 대화를 주고 받았고, 몬트리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까지 배웅해 주며 친절을 베풀어 준 김태정선생의 따뜻한 사랑은 잊을수 없었다. 대화중 한마디 한마디에 묻혀있는 나라사랑,애국심은 용광로의 끓는 쇳물같이 뜨꺼웠다.

 

그는 건강때문에 그토록 그리워해 온 북녘 땅을 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그는 무척 사람을 그리워했다. 거동하기조차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운 날씨에 역전앞에 나와 기자와의 짧은 만남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김태정선생, 그의 아들, 그리고 김창준선생과 토론토에서 만나 짧은 대화라도 나눌수 있었던 것은 먼길을 달려온 기자로서는 다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8시반에 떠나는 몬트리얼행 버스에 올라 새벽2시30분에 도착하는 7시간 동안 버스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특히 김태정선생도 “이렇게 만난것만 하여도 다행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여건이 여의치 못해 집으로 함께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몬트리얼로 함께 여행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여러차례 하기도 했다. 기자는 이곳으로 오기전 김태정선생이 벵쿠버에 거주할때 1천5백마일 거리였지만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여 2차례나 심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들이 남달랐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이며 이민생활 전 기간을 나라사랑, 민족사랑으로 한생을 보내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김태정선생은 북부조국 바로알리기 운동선구자

 

김태정선생은 카나다의 통일운동가 (고)강원진 선생과 함께하면서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는 특히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인터네트 활동을 통해 북부조국 바로알리기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블러그 등 북녘사회 바로알리기 운동을 벌이다가 이명박 정부당국에 의해 다섯차례나 블러그 및 홈페지가 폐쇄당해야 했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은 미국이나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얼굴이 간지러울 정도로 아첨하면서 제 동족이며 통일을 해야 할 대상인 이북에 대해서는 전례없는 적대시정책으로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지적해 왔다

 

남녘의 이명박 정권하의 국정원과 공안당국은 그 당시 김태정 선생(필명:봄호수)이 "지난 7년간 7만건의 북찬양 글을 인터넽에 올렸다"고 주장하며 그를 친북인사로 몰아 국내외 동포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악선전을 해왔다. 국정원은 또 봄호수가 한국에 있는 인터네트 사이트들을 이용하여 <종북카페>를 운영해 왔다고 발표하기도했다.

 

그는 이에 대해 "한국사회가 너무나 이북을 왜곡하고 중상모략하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바로 알리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고 답변하면서 "지난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 10년 동안 10만여개 이상의 북 바로알리기 글들을 한국 인터네트 공간을 이용하여 발표해 왔다"고 회상했다.

 

"8순이 넘은 나이인데 어떻게 인터네트를 통해 이북 바로알리기 운동에 참여하여 왔습니까?"라고 묻자 "인터네트 활동은 20여년이 넘었지만 사실 우리 민족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한지는 이미 65년전의 일"이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이미 14~5세에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빨치산 대장 신덕균의 외조카로 경북 청송에 있는 외가댁에서 빨치산 심부름꾼으로 참여한 추억들도 알려주었다.

 

김태정선생의 애국활동 역사

 

 

그는 1974년 카나다로 이민와서도 토론토 영사관 앞에서 피키트 들고 김대중 선생 구출운동을 시작하면서 이상철 목사, 김재준 목사, 민중신문 만들던 정철기 선생, 강원진 선생 등과 한국민주와운동에 적극참여해 왔다. 1980년 광주항쟁부터는 맥길대학이 제작한 광주필림을 구입하여 교육회관 등에서 상영하여 동포사회에 전두환 학살군사정권의 죄악을 폭로하는 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미국방문하여 로널드 레간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카나다 오따와에 들렸을 때 토론토에서 버스를 타고 40여명과 함께 먼곳을 가서 그의 방문일정을 가로막는 시위를 벌이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김태정 선생은 그 이후 중국길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이북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1981년 평양을 방문했다. 아버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지만 외삼촌 신덕균과 이모 신갑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소식은 빨치산 노병회상기에 아버지 존함과 같은 김만수 대원이 행군도중 졸라병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어 "1981년 부터1995년까지 다섯번 방북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오진우 무력부장과도 접견하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대에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회의들에도 참여했다. 헬싱키, 비엔나에서 열린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회의에도 4번이나 참여했고, 1990년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차 카나다대표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준비회의에 참여하여 북과 해외대표들이 사전회의를 한 모임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민족시인으로서도 활동했다. "비록 해외에 산다할지라도 나는 자주를 지키는 전사"라는 그의 시가 북에서 1993년 발간한 통일문학 17호(465쪽)에 게재되기도 했고, 그 이듬해인 1994년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을때 김태정 선생은 북미주조선친선협회 카나다지역본부 수석의장으로서 동포언론 신한민보와 이북언론에 조시를 발표한바 있었다.

 

김태정 선생은 암투병하기 이전시기에는 한때 한국의 블러그나 까페 5개를 운영하면서 통일관계, 남북관계 글들을 10만여 개 가량 올렸으나 한국정부 당국은 그것들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명목으로 그가 경영주로 활동하던 사이트들 5개를 폐쇄중단 조치까지 단행했다. 공안당국의 주장은 그 글들이 북찬양이라는 주장이었다. 다시말하면 북을 바로알리기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북을 있는대로 알린다면 현 한국정부의 입장이 난처해 진다는 말과도 같은 자세가 공안당국의 성격이었다.

 

“특히 이명박정권은 천하의 반민족세력”

 

이명박 정권이 폐쇄시킨 블로그 중 "봄호수 블로그"는 독자가 95만까지 되었는데 이것도 이명박 정권의 공안당국이 폐쇄시켰다고 폭로한 김태정 선생은 "특히 이명박 정권은 천하의 반민족 세력"이라고 규탄했다.

 

그는 카나다에 이민와서 처음 10년은 토론토지역에서, 그리고 그후 33년은 뱅쿠버지역에 거주하다가 최근에 다시 아들이 살고 있는 토론토지역으로 이사 왔다. 그는 뱅쿠버에 거주할 때에는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회유공작도 체험했고, 공갈협박, 고립압박같은 접근도 경험했다. 그는 그러나 "미군이 조국반도에 주둔하는 한 한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히면서"식민지 땅에는 발을 딛지 않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뱅쿠버에서 살면서 때로는 못된 한국정치인이 이곳에 와서 강연을 하는 경우에 그 장소에 직접가서 규탄하며 강연회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그 한 예가 김종필의 뱅쿠버 방문때였다. 그런가하면 김태정 선생 자신도 동포사회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내가 가게를 하며 꽃집을 경영할 때 어용인사들 40여명이 꽃도매상 앞에서 나를 둘러싸고 빨갱이 소동을 벌이며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카나다 정부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도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최홍희 장군과의 교제가 시작되면서 한층 더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카나다지역위원회에 대표로 활동하며 조직적인 통일운동에도 참여한바 있었다."고 말한다.

 

김태정 선생은 뱅쿠버까지 방문해 준 민족통신 특파원에게 "정말로 감사한다"면서 자신의 주위 분들을 급하게 연락하여 친교시간을 갖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기억도 떠올랐다. 그 때 기자는 김정일국방위원장 서거관련하여 방북취재하고 돌아와 현지상황을 설명해 준적도 있었다. 그당시 그 자리에는 6.15공동선언실천 카나다지역위원회 유동성 뱅쿠버 위원장을 포함하여 김신규 선생부부, 안태훈 선생 부부, 엄종순 여사(김태정 선생 부인) 등이 함께했다.

 

김태정 선생의 지난 시기 취미생활은 독특했다. 그는 건강했을 시기에는 수석(돌) 수집활동에도 취미를 갖고 있었다. 벵쿠버 그의 자택 1층, 2층, 그리고 정원 등에는 각종 희귀한 돌들이 전시되어 있단 것이 기억나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카나다 이민길에 오르기 전에 한국 덕수궁에서 돌전시회를 힐 정도로 돌수집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김태정 선생은 1932년 5월30일 경북 의성군 점곡에서 태어났다. 점곡국민학교와 점곡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미술학원에서 미술공부를 마치고 한 광고회사에서 삽화를 그리는 디자이너로 20여년 일하다가 취업이민으로 1974년 카나다로 왔다. 3남1녀을 둔 가장으로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여 지금 18명의 혈육들이 토론토와 뱅쿠버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끝) 



 

 

 

아버지 金晩秀 1911년 11월 7일생 ~ 노병의 회상기에 의하면 김만수대원이 1930년대 후반혹은 40년대초반 행군도중 전염(쫄라)병으로 희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음. (쫄라) 중국어 같음

 


 

어머니 申益伊 1908년 9월 1일 ~ 1990년 4월 19일

 

나 (봄호수) 金泰廷 1932년 5월 30일 ~ 호적에는 1932년 6월 25일

 

처 嚴鍾順 1940년 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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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壽石趣味 / 舜朝 金泰廷

 

2013년 9월 5일 망향

 

 

          

 

 

    

 

 

 

 

 

 

 

 

 

 

 

 

 

 

 

 

 

 

 

 

 

 

 

 

 

 

 

 

 

 

 

 

 

  나의 壽石趣味 / 南谷 金泰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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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壽石은 단단한 烏석이 으뜸이다
        그러나 이를 간직하는 사람의 마음은
        솜털보다 희고 부드러워야 하며
        하늘의 높푸르름과 강물의 유유함도
        함께 마음에 담아 오는 것이
        수석인의 취미가 아닐까 싶다.

    • 나는 한때 20여년간 수석에 가이 미치다 싶히 심취했었다.
      로키산의 깊은 계곡 대자연 속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무아지경에서 강가를 누비며 수석을 채집한다는 것은 신선노름이었다.

 

 


 






 

 

 

 


Re : 봄호수 선생님 소식입니다.
댓글 : #2
가입 : 31 Aug. 2017
우편 : 61
2018-01-27 06:55:25
댓글 |  신고
봄호수 선생님
 
수석이 참 아름답습니다.
 
가까이서 실제 보고십지만 사진으로 만족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옆에 계신것만으로도 저희는 힘이 납니다.
 
 
뭔가 올해 우리민족에게 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 건강을 유지하시기 바라며
 
 
선생님의 글 계속 기대합니다.
 
 
후학 올림.
 

 
Re : 봄호수 선생님 소식입니다.
댓글 : #3
가입 : 11 Apr. 2014
우편 : 74
2018-01-27 09:26:30
댓글 |  신고
훌륭하십니다.
 
박수로 대신합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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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봄호수 선생님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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