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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핔 : [북한군일화] 1.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가입 : 28 Au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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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6 10:07:34 | 조회 (5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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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일화] 1.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해금강
기사입력: 2017/06/06 [04:2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모 페이스북에 해금강이란 아이디를 가진 이가 북한군에 관한 흥미있는 일화들을 연재하고 있어 자주시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국가보안법을 준수하기 위해 일부 내용은 조금 다듬었습니다. 북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고조되어가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뿌리깊은 분단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 윌리넘 딘 소장, 대전 전투에서 북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필자 주: 이 자료는 다큐 '딘의 포로생활'을 찾은 후 공개하려다가 희망이 없기에 그대로 공개합니다.]


호주의 기자 윌프레드 버체트(Wilfred Burchett)가 어떻게 유명한 기자가 되었고 서방으로부터 배척받았는가, 또 그가 어떻게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는가 하는데 대해 지금도 아이러니한 점이 많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 지지 않은 몇가지 사실을 공개한다.

 

 

1. 운명의 기회


버체트는 1950년대초까지만 해도 별로 잘 알려 진 언론인이 아니었다. 물론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우익적이고 서방의 입장에 선 언론인일 따름이다. 그가 극좌적인 성향이 강하다면 1951년 6월부터 진행된 조선전쟁의 유엔군측 호주기자로 정전담판을 취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버체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본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정전담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저녁,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 온 버체트는 우연히 자기의 군복주머니에 쪽지편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정전담판과는 대비도 안 될 토픽뉴스를 취재할 생각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 누구를 조용히 만나라는 북한측의 통고였다. 이미 아무 소득이 없는 정전담판취재에 신물이 났던 버체트는 주저없이 취재를 그만두고 출국하여 북한이 지정한 3국에 가서 북한이 파견한 안내원을 비밀리에 만난다.

 

북한측은 이미 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토픽뉴스감을 공개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동구권에서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미국과 서방이 폄하할 수 있었으므로 서방의 우익언론인들 가운데서 진보적 성향이 강한 인물을 고르던 중 버체트가 걸려든 것이다. 북한은 버체트를 충분히 입체적으로 요해한 다음 그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토핑뉴스를 보도할 수 있다고 점찍었다. 전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토핑뉴스이며 북한의 수가 얼마나 높고 전략적 안목이 깊은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북한 안내원을 따라 버체트가 간 곳은 자강도의 어느 한 골 안이다.

 


2. 미 24사 사단장 딘 소장을 만나다

 

거기에 바로 미군 24사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생활을 하는 집이 있었다. 북한은 딘 소장을 포로한 후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따로 격리시킨 후 전문안내요원을 붙여 별장과 같은 곳에서 생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행방불명된 후 거의 10개월 이상 북한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 미국에서도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고 지어는 아주 건강하고 활기넘친 딘 소장을 직접 취재하게 된 버체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버체트는 며칠 동안 그 별장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딘의 기상으로부터 시작하어 조깅, 식사, 카드게임, 독서, 휴식, 수영, 산보, 취침 등 상상을 초월하는 포로생활 전부를 그대로 동영상필름에 담았고 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면서 대전작전의 실패와 산속에서 헤메다가 포로될 때까지의 과정, 포로수용소에서 신분확인한 후 격리시켜 잘 대우해 준데 대하여 사실 그대로 취재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온 다큐가 바로 '딘의 포로생활'이다. 사기가 나서 호주로 돌아 온 버체트는 이 다큐를 미국에서 개봉했다.

 

이 다큐가 얼마나 미 정계에 대파문을 일으켰는가는 굿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불과 20여분밖에 안 되는 하나의 짤막한 이 다큐가 전반적인 전쟁국면에 큰 영향을 주고 일약 버체트를 세계적인 유명언론인으로 만들었다.

 

▲ 한국전쟁 당시 워커 중장이 딘 소장(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워커는 인민군 매복에 걸려 폭사하였고 딘은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시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였다.    



3. 딘은 누구인가, 왜 북한이 딘 소장을 버체트에게 공개했는가?

 

그러면 딘은 어떤 인물이며 북한이 무슨 목적으로 포로된 딘 소장을 버체트를 통해 미국에 공개했는가?

 

바로 딘은 트루맨 대통령의 매부이다. 다른 말로 트루맨 대통령의 누이 남편이 바로 윌리엄 딘이다. 그러기에 딘은 자기의 직속상관인 워커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지금껏 죽은 줄 알았던 자기 남편이 북한에 포로되어 포로생활을 한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본 딘의 아내는 화가 나서 미 국회에 나타났다. 그녀는 국회의원들을 삿대질하며 자기 남편을 살려 내지 못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소리 쳐 온 국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딘의 생사여부가 미국의 체면, 트루맨의 체면과 연관되므로 차라리 죽었다면 모르겠는데 살아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으니 트루맨과 미국회는 그야말로 호미난방이 되었다. 미국 역사상 장성급으로서 적국에 포로된 것은 딘이 유일하다. 급해 맞은 트루맨과 미 국회가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에게 포로송환문제를 북한의 요구대로 들어주라고 강압하어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북한은 정전담판에서 가장 난제였던 포로송환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딘 소장 한명을 카드로 하어 수 만명의 자기측 포로들을 구출한 것이다.

 

조선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차마 딘 소장과 관련한 이 모든 사실들을 공개할 수 없었으므로 지금껏 숨겨왔다. 그러나 북한에는 지금도 '딘의 포로생활'이라는 다큐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왜 이 다큐를 공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딘 소장     자주시보



4. 딘 소장의 포로일화

 

딘을 포로한 과정은 믿기지 않는 하나의 소설이다.


조선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0년 7월 초 김일성 수상은 북한군 전략정찰일꾼들로부터 미국과 유엔의 조선전쟁개입기획에 대한 자료를 받는데 여기에 바로 딘 소장의 개인 인물자료가 있었다. 이 자료는 뜻밖에도 일본 도쿄의 미 8군 사령부에서 보내 온 것이다. 딘이 트루맨과 처남매부관계라는데 주의 돌린 김일성 수상은 미 24사와의 전투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조선전쟁의 운명을 판가리하고 특히 정치적인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로 간파하고 미 24사를 포위 소멸할 기획을 세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어 딘을 포로하려는 기획이다. 그리하여 세계전쟁사에 포위전의 전형으로까지 평가받는 대전포위전투가 창조된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작전이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의 목적, 즉 딘을 포로하기 위해 무려 20여 개 이상의 북한군 특공대가 대전에 침투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특공대와 대비가 안 되므로 딘 포로작전은 실패하지만 이러한 특공대들의 검질진 추격에 혼쭐이 난 딘은 혼자서 산속을 거의 한 달가량 헤매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민가에 내려왔다가 포로 된다.


포로 될 당시 병사복을 입었으므로 북한군 군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일반 병사포로들과 같이 대우한다. 얼마 후 미군포로들의 담화과정에 딘은 자기가 미 24사 사단장 딘 소장이라는 것을 실토한다.

 

원래 딘은 1950년 10월에 공개되어 송환될 수도 있었다. 신천에서 북한의 황해도위원장 김용진이 미군에 포로되었을 때 북한 지도부가 김용진을 구출하기 위해 구월산 주민유격대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구월산 주민유격대는 내부 알륵이 심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전투를 실제상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딘 소장과 김용진 위원장을 교환할 기획을 추진하였으나 미군이 김용진을 너무 빨리 사형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교환할 때 북한에서는 딘 소장에게는 그의 요구대로 포로번호 24번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잘 알려 지지 않은 하나의 일화이다.

 

▲ 윌프레드 버체트 기자(Wilfred Burchett)  



5. 그후의 버체트


북한에 잘 보여 일약 유명기자로 된 버체트는 정전담판취재에 아예 흥미를 잃고 조선전쟁 전 기간 북한에 가서 취재한다. 그의 활동으로 하어 미국과 유엔군의 만행자료들이 그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 세계에 공개된다.

 

호주는 영국과 함께 미국에 추종하어 조선전쟁에 가담한 후 무고한 조선 사람들을 수많이 학살한 주요 장본인인데 저들의 만고죄악이 다름 아닌 제나라 언론인에 의해 폭로되니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서방, 호주는 버체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든 것이다. 그 이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누가 인권옹호자이고 누가 인권범죄자인가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1   
Re : [북한군일화] 1.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댓글 : #1
가입 : 29 Aug. 2013
우편 : 2867
2017-06-06 12: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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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보던모습인데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 생활 이야기

 
http://nasica1.tistory.com/53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포로가 (당연히) 많이 생겼습니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는 싸움에 졌는데 죽지 않고 생포되어 목숨을 구하는 것이 굉장히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 유럽에서는 싸우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항복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항복이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항복에는 조건부 항복과 무조건 항복이 있었는데, 일단의 부대가 전장에서, 혹은 지키던 도시나 마을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적과 조건부 항복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가장 유리한 항복 조건이란 지키고 있던 장소를 적에게 넘겨주는 대신, 항복하는 부대가 무기와 군기를 포함한 모든 짐을 소지한 채로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원수를 멸족시키기 위한 감정적 싸움이 아니라, 왕가끼리 또는 국가끼리의 영토 등 이권 다툼을 결정짓기 위한 사업에 가까왔기 때문에, 적을 얼마나 더 죽이느냐가 목표가 아니라 어떤 장소를 빼앗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비군이 이런 조건부 항복을 요청한다면, 공격군 입장에서도 굳이 더 피를 흘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수비군 입장에서도 병력이나 식량 부족으로 인해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투라면, 애꿎은 병력을 소모시키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그 병력을 쓰는 것이 더 유리했지요.  항복 조건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소총이나 군도 같은 개인 무기는 가져가되 대포는 두고 가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아예 무장 해제시킨 뒤 몸만 빠져나가도록 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는 장교들만 돌려보내고, 병사들은 포로로 잡아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가장 빛나는(?) 항복을 한 사람은 아마도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일 것입니다.  1800년 4월부터 6월까지, 그는 수비군보다 거의 3배 많은 오스트리아 포위군을 상대로 이탈리아 북서부 항구도시 제노바(Genova)에서 60일간 끈질긴 저항을 하다 결국 식량 부족으로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수비군이 워낙 치열하고 질긴 방어전을 펼친 덕분에, 그는 항복 협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즉 가장 유리한 조건인 군기와 무기를 모두 포함한 짐을 가진 채로 프랑스 영토로 행군해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한 것입니다.  특히 마세나가 60일 동안이나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제노바에 붙들어 둔 덕분에 나폴레옹이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고개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Marengo)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항복은 나폴레옹으로부터도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군 참모장도, 마렝고 전투의 패배 이후 나폴레옹에게 '당신의 승리는 알레산드리아 앞(마렝고를 지칭)이 아니라 제노바에서 이루어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중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군은 당연코 뒤퐁(Pierre Dupont)입니다.  그는 1808년 7월 스페인 바일렌(Bailen)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군단 전체를 이끌고 항복을 해야 했는데, 그는 항복하면서 지키던 도시를 적에게 넘겨준 것도 아니었고, 또 항복 조건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당장은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모든 짐, 심지어 톨레도(Toledo) 등 그동안 뒤퐁 군단이 점령하고 약탈했던 도시들에서 빼앗은 약탈물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일단 항구 도시 카디즈(Cadiz)로 간 뒤, 거기서 배편으로 전병력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것이었거든요.  심지어 내려놓은 무기도, 대포까지 포함해서, 모두 카디즈에서 같은 배편에 실어주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스페인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군은 카디즈에 도착한 프랑스군에게 배편도 없고 있다고 해도 영국 해군이 프랑스군의 출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교들만 귀국을 허락했고, 병사들은 모두 포로로 스페인에 억류했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뒤퐁은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고 투옥되어 나폴레옹 패망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바일렌에서의 항복... 어느쪽이 프랑스군인지는 굳이 설명 안드려도 아실 겁니다.  특히 스페인 측에는 군복을 입지 않은 민병대원도 포함된 것이 눈에 띄네요.)
 
 
 
이런 조건부 항복 외에도,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하는 경우도 물론 많았습니다.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하여 전멸을 앞 둔 경우나, 아예 전장에서 적의 총검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상태라면 항복에 조건이 붙을 수 없었지요.  이렇게 항복한 경우에도, 비록 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정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자칭 신사라고 하는 인간들이 장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낭만주의 같은 것이 살아있었습니다.  가령 장교가 항복을 할때는, 항복의 표시로서 자신의 검을 뽑아서 상대방 장교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면, 항복을 받아들이는 장교는,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 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허락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다만 권총같은 화기는 몰수했습니다.  항복한 장교에 대한 대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항복한 지휘관은 대개 자신을 포로로 잡은 적부대의 장교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100년 전쟁때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가 된 필립왕이 그날 저녁 흑태자에게 정중한 식사 시중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항복한 장교에게 언제나 손님 대접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복한 장교는 결국 적국 후방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프랑스는 포로들을 베르덩 시에 거대한 포로 수용소를 지어놓고 거기에 감금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영토가 좁았던 영국은, 항구에 헐크(hulk)라고 하여, 낡은 화물선이나 군함을 해상 교도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프랑스군 포로들을 수용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포로 대접이 영~ 시원찮았던 셈이지요.  영국군들도 이런 곳에 수용되는 프랑스 포로들에 대해 많이 동정했다고 합니다.
 
 
 
물론 장교들과 사병들은 분리 수용되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장교는 신사로서 사회 지배층으로 간주되었지만, 사병들은 글자 그대로 쫄병 취급을 받아 대접이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열악한 급식과 불결한 주거 환경으로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나찌의 유태인 수용소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고요,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포로들의 사망률은 55명당 1명으로서, 영국 해군의 사망률인 30명당 1명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포로가 된 장교들에게는 본국으로부터 편지는 물론이고 봉급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보직 장교에게 주어지는 half-pay지요.)  감옥 생활하는 주제에 봉급으로 뭘 하느냐고요 ? 그걸 이해하려면 당시 포로가 된 장교의 생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The Surgeon's Mate by Patrick O'Brian  (배경: 프랑스, 1813년) ----------------------
 
 
 
루소는 파브르 박사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스티븐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 식사는 물론 시켜 먹겠네.  문제는 어디에 주문하느냐 하는 건데, 이 신사분은 말이지," 스티븐은 오브리 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갓 낳은 달걀에, 죽과 쌀 미음(rice-water)을 아주 신선하게 드셔야 하거든.  그리고 난 커피가 뜨거워야 하네."
 
 
 
"문제 없습니다."  루소가 대답했다.  "여기서 100 야드도 안 떨어진 곳을 알거든요.  마담 뷰 르이듀는 하루 중 언제라도 요리를 만들고, 또 고급 와인도 제공한답니다."
 
 
 
"그렇다면 그 미망인에게 주문하도록 하지.  이 신사분들에게는 신선한 우유와 보통의 부드러운 빵을, 내게는 커피와 크롸상을 준비해주게.  특히 커피는 강하게 끓여주게."
 
 
 
루소는 이 주문 내용은 듣지도 않고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고객분들은 봐쟁이나 룰 식당 같은 곳에 주문하기를 바라곤 합지요.  어떤 고객들은 돈을 그냥 창 밖으로 던져 버리더라고요.  제가 뭐 제 사적인 의견을 고객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취향이라는 건 다 다르쟎습니까... (중략)"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지." 스티븐이 말했다.
 
 
 
루소는 그대로 자기 말을 계속 했다.  "제가 뭐 황제의 식탁같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신사분들을 속이지 않아요.  그저 정직한 중산층 요리일 뿐이라구요.  하지만 그 씨베 드 라뼁(Civet de lapin: 레드 와인으로 만든 토끼 스튜, 역주)의 맛은 정말 !... (중략)"
 
 
 
"자,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겠네." 스티븐이 말했다.  "우유, 부드러운 빵, 커피, 그리고 크롸상일세.  그리고 특히 커피는 진하게 끓여달라고 부탁해주게."
 
 
 
커피가 왔고, 맛을 보니 주문대로 진했다.  뜨겁고, 진했고, 아주 놀랍도록 향기로왔다.  크롸상은 기름졌으나, 너무 기름지지도 않았다.  아주 정말 멋진 아침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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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 위의 대화는 어디서 이루어진 대화였을까요 ?  이 글의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로로 잡힌 영국 해군 장교들과 프랑스 간수 사이의 대화입니다.  전쟁 포로가 파리 시내의 식당에서 요리를 시켜 먹는다 ?  그럼 돈은 누가 냈을까요 ?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먹을 사람이 내야지요.  따라서 똑같은 포로라고 해도, 돈이 있는 장교와 돈이 없는 장교는 생활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Surgeon's Mate' 편에서도, 간수가 처음에는 교도소 식사(prison ration)를 하시겠냐, 외부에 시켜드시겠냐고 묻습니다.  포로로 잡힌 일행 중 야기엘로 대위는 돈이 없었던 관계로, '난 교도소 식사를 먹어보겠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스티븐이 대신 밥값을 내주지요.   
 
 
 
당시 장교들이 불편하고 지루한 포로생활을 면하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1. 가석방 (parole)
 
 
 
당시는 아직 18세기의 잔재가 진하게 남아있는, 즉 낭만이라는 것이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포로가 된 장교들에게는, 가석방 문서에 서명하라는 제안이 주어졌습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자기가 포로가 된 것을 인정하고, 탈출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이 문서에 서명하면, 그 장교는 감금되지도 않고, 감시도 붙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롭게 사는 거지요.  그러자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  예, 돈이 필요하지요.  돈이 없으면 감금생활이나 가석방 생활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  당시 분위기는 유전(有錢)품위 무전(無錢)망신이었습니다. 
 
 
대신 그 문서에 서명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혹은 포로 교환이 이루어져 석방될 때까지는 몹시 지루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전쟁이 근 2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히 서명할 문제는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이런 가석방 제도는 귀족 장교들이 편하게 포로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 포로 교환
 
 
 
당시에는 적군끼리도 정기적으로 연락장교들이 만나서 포로들의 편지도 교환하고 양쪽 군 지휘관끼리의 공식 문서도 주고 받았습니다.  이때 교환되는 문서 중의 하나가, 양쪽이 서로 붙잡고 있는 포로들의 명단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서로 교환할 만한 장교의 이름을 발견하면 '맞바꾸자'라는 제안이 오고 갔습니다.  물론 상응할 만한 계급끼리 교환이 이루어졌지요.  그렇다고 이런 교환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고, 특정인물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거나 또는 악질적인 전범인 경우에는 이런 교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1803년 짧은 휴전 뒤에 다시 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국에 대해 철천지 원수같은 앙심을 품고 있어서, 영국과는 포로 교환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이런저런 피치못할 사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붙잡더라도, 제대로 포로를 후방으로 후송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 장교에게 일종의 '가불' 포로 교환이 제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포로 교환 조건에 따라 먼저 풀어주는 거지요.  대신 가석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식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 전쟁에서 적국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상대방이 신사라는 것을 믿고, 상대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장교들 이야기입니다.  졸병들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건 사실 포로가 되기 전, 아군 장교들에게서도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까 뭐 별로 다를 바도 없었겠지요.  가장 참혹한 대접을 받은 졸병 포로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뒤퐁 휘하에 있다가 포로가 되어 억류된 약 2만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디즈 항구의 낡은 선박들에 수용되어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가 많은 수가 병과 굶주림, 폭동 등으로 죽었고, 그러고도 살아 남은 병사 중 7천명은 결국 지중해 내의 무인도인 카브레 (Cabrera) 섬에 수용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수용이 아니라 그냥 무인도에 버리고 간 셈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거의 전국토를 프랑스군에게 유린당한 상태라서 포로들에 대한 배급은 커녕 자기 군대조차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이들에 대한 보급은 잊을 만 하면 가끔씩 가서 밀가루 몇 통을 바닷가에 투척하고 가는 정도였고, 이 섬의 프랑스 포로들은 자기들끼리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 섬에서는 식인 사건까지도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들이 구조된 것은 반 이상의 포로들이 죽은 뒤인 1814년 7월 6일이 되어서였습니다.  무려 4년이 넘는 무인도의 기아 생활을 한 뒤였지요.  이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C. S. Forester의 걸작 소설 시리즈인 '혼블로워' 중 짧은 단편인 'HORNBLOWER'S CHARITABLE OFFERING'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대탈주'처럼, 포로로 있다가 탈출하여 영웅 대접을 받은 경우가 있었을까요 ?  예,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그랜트(Colquhoun Grant)라는 영국군 장교였습니다. 
 
 
 
이 양반은 EO(Exploring Officer)라고 해서, 정찰 장교였습니다.  EO라는 일을 하는 장교는, 요즘으로 따지면 고공 정찰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즉, 적의 후방 지역을 말을 타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단, 적의 후방이라고 해도, 반드시 군복 정복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붙잡혔을 때 스파이로서 교수형을 당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군복을 입고도 적의 후방에서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빠른 말이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현대전에서도 정찰기가 적 후방에서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속도로 고공 비행을 해야 하지요 ?  이런 EO들은, 건초를 먹여서 키우지 않고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만 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이 스태미너가 훨씬 좋았나 봅니다.  대개의 기병대원들이 타는 말은 아무래도 값이 싼 풀을 먹었는데, 이런 말들은 곡물을 먹고 자란 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랜트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했는데, 탁월한 기민함과 과감성으로 프랑스군 점령 지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프랑스군의 움직임 파악이나 스페인 빨치산과의 연락 등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그랜트가 유명해진 사건은, 그랜트의 말이 결국 실수를 하여 프랑스군에 체포되었던 건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랜트는 뭐 그렇게 나쁜 대우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간에 영국 군복을 입은 장교였으므로, 그랜트는 포로가 된 장교로서 괜찮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랜트는 프랑스로 압송된 이후, 파리에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영국군 군복을 입은 채로, 파리 시내를 몇 주동안 태연히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호텔에도 투숙하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요.  그의 군복이 영국군 전통의 붉은 코트인 것을 보고 의심스러워 하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저는 미국군 장교입니다' 라고 뻥을 치고 돌아다녔는데, 이게 아주 잘 먹혔다고 합니다.  1812년 발발한 미국과 영국간의 전쟁 때문에,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 관계였거든요. 
 
 
 
결국 항구도시인 낭트까지 흘러들어온 그랜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인 선장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전쟁 상태였지만, 같은 앵글로 색슨족인데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로 인해, 당시에도 개인들 간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랜트에 대해서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하즈웰(Jock Haswell)이라는 사람이 1969년에 'The First Respectable Spy' 라는 제목으로 이 사람에 대한 책을 썼다는데, 전 못 읽었습니다.  Sharpe 시리즈의 작가인 Bernard Cornwell은 읽은 모양입니다.  샤프의 성격이나 모험 중 상당 부분은 이 그랜트의 이야기로부터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
 관대한 포로 문화가  합리성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긴 싸움에서 적군 포로들을 학살하면,
다음 싸움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아군피해가 커지거나 적측에 의한 피의 보복이 순환되니 필요 이상으로 전쟁이 잔혹하고 가혹해지는 걸 차단하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
->일각에서 그레이트 브리튼은 현재영국이 아니라 조선을의미한다는이야기도 있긴하더군요 
보통 유대왜구들포로취급은 그다지 좋지않습니다. 
그당시에도 북조선은 관대한포로대우를하는편이었군요 
조선반도전쟁때 남괴뢰군이 북조선에 투항하는경우가 많은게
관대한포로대우라고 하는이야기를들은적이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포로가 (당연히) 많이 생겼습니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는 싸움에 졌는데 죽지 않고 생포되어 목숨을 구하는 것이 굉장히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 유럽에서는 싸우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항복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항복이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항복에는 조건부 항복과 무조건 항복이 있었는데, 일단의 부대가 전장에서, 혹은 지키던 도시나 마을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적과 조건부 항복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가장 유리한 항복 조건이란 지키고 있던 장소를 적에게 넘겨주는 대신, 항복하는 부대가 무기와 군기를 포함한 모든 짐을 소지한 채로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원수를 멸족시키기 위한 감정적 싸움이 아니라, 왕가끼리 또는 국가끼리의 영토 등 이권 다툼을 결정짓기 위한 사업에 가까왔기 때문에, 적을 얼마나 더 죽이느냐가 목표가 아니라 어떤 장소를 빼앗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비군이 이런 조건부 항복을 요청한다면, 공격군 입장에서도 굳이 더 피를 흘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수비군 입장에서도 병력이나 식량 부족으로 인해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투라면, 애꿎은 병력을 소모시키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그 병력을 쓰는 것이 더 유리했지요.  항복 조건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소총이나 군도 같은 개인 무기는 가져가되 대포는 두고 가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아예 무장 해제시킨 뒤 몸만 빠져나가도록 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는 장교들만 돌려보내고, 병사들은 포로로 잡아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가장 빛나는(?) 항복을 한 사람은 아마도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일 것입니다.  1800년 4월부터 6월까지, 그는 수비군보다 거의 3배 많은 오스트리아 포위군을 상대로 이탈리아 북서부 항구도시 제노바(Genova)에서 60일간 끈질긴 저항을 하다 결국 식량 부족으로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수비군이 워낙 치열하고 질긴 방어전을 펼친 덕분에, 그는 항복 협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즉 가장 유리한 조건인 군기와 무기를 모두 포함한 짐을 가진 채로 프랑스 영토로 행군해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한 것입니다.  특히 마세나가 60일 동안이나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제노바에 붙들어 둔 덕분에 나폴레옹이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고개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Marengo)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항복은 나폴레옹으로부터도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군 참모장도, 마렝고 전투의 패배 이후 나폴레옹에게 '당신의 승리는 알레산드리아 앞(마렝고를 지칭)이 아니라 제노바에서 이루어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중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군은 당연코 뒤퐁(Pierre Dupont)입니다.  그는 1808년 7월 스페인 바일렌(Bailen)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군단 전체를 이끌고 항복을 해야 했는데, 그는 항복하면서 지키던 도시를 적에게 넘겨준 것도 아니었고, 또 항복 조건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당장은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모든 짐, 심지어 톨레도(Toledo) 등 그동안 뒤퐁 군단이 점령하고 약탈했던 도시들에서 빼앗은 약탈물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일단 항구 도시 카디즈(Cadiz)로 간 뒤, 거기서 배편으로 전병력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것이었거든요.  심지어 내려놓은 무기도, 대포까지 포함해서, 모두 카디즈에서 같은 배편에 실어주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스페인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군은 카디즈에 도착한 프랑스군에게 배편도 없고 있다고 해도 영국 해군이 프랑스군의 출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교들만 귀국을 허락했고, 병사들은 모두 포로로 스페인에 억류했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뒤퐁은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고 투옥되어 나폴레옹 패망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바일렌에서의 항복... 어느쪽이 프랑스군인지는 굳이 설명 안드려도 아실 겁니다.  특히 스페인 측에는 군복을 입지 않은 민병대원도 포함된 것이 눈에 띄네요.)

이런 조건부 항복 외에도,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하는 경우도 물론 많았습니다.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하여 전멸을 앞 둔 경우나, 아예 전장에서 적의 총검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상태라면 항복에 조건이 붙을 수 없었지요.  이렇게 항복한 경우에도, 비록 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정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자칭 신사라고 하는 인간들이 장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낭만주의 같은 것이 살아있었습니다.  가령 장교가 항복을 할때는, 항복의 표시로서 자신의 검을 뽑아서 상대방 장교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면, 항복을 받아들이는 장교는,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 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허락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다만 권총같은 화기는 몰수했습니다.  항복한 장교에 대한 대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항복한 지휘관은 대개 자신을 포로로 잡은 적부대의 장교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100년 전쟁때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가 된 필립왕이 그날 저녁 흑태자에게 정중한 식사 시중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항복한 장교에게 언제나 손님 대접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복한 장교는 결국 적국 후방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프랑스는 포로들을 베르덩 시에 거대한 포로 수용소를 지어놓고 거기에 감금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영토가 좁았던 영국은, 항구에 헐크(hulk)라고 하여, 낡은 화물선이나 군함을 해상 교도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프랑스군 포로들을 수용했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포로 대접이 영~ 시원찮았던 셈이지요.  영국군들도 이런 곳에 수용되는 프랑스 포로들에 대해 많이 동정했다고 합니다.

 

물론 장교들과 사병들은 분리 수용되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장교는 신사로서 사회 지배층으로 간주되었지만, 사병들은 글자 그대로 쫄병 취급을 받아 대접이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열악한 급식과 불결한 주거 환경으로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나찌의 유태인 수용소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고요,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포로들의 사망률은 55명당 1명으로서, 영국 해군의 사망률인 30명당 1명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포로가 된 장교들에게는 본국으로부터 편지는 물론이고 봉급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보직 장교에게 주어지는 half-pay지요.)  감옥 생활하는 주제에 봉급으로 뭘 하느냐고요 ? 그걸 이해하려면 당시 포로가 된 장교의 생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The Surgeon's Mate by Patrick O'Brian  (배경: 프랑스, 1813년) ----------------------

 

루소는 파브르 박사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스티븐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 식사는 물론 시켜 먹겠네.  문제는 어디에 주문하느냐 하는 건데, 이 신사분은 말이지," 스티븐은 오브리 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갓 낳은 달걀에, 죽과 쌀 미음(rice-water)을 아주 신선하게 드셔야 하거든.  그리고 난 커피가 뜨거워야 하네."

 

"문제 없습니다."  루소가 대답했다.  "여기서 100 야드도 안 떨어진 곳을 알거든요.  마담 뷰 르이듀는 하루 중 언제라도 요리를 만들고, 또 고급 와인도 제공한답니다."

 

"그렇다면 그 미망인에게 주문하도록 하지.  이 신사분들에게는 신선한 우유와 보통의 부드러운 빵을, 내게는 커피와 크롸상을 준비해주게.  특히 커피는 강하게 끓여주게."

 

루소는 이 주문 내용은 듣지도 않고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고객분들은 봐쟁이나 룰 식당 같은 곳에 주문하기를 바라곤 합지요.  어떤 고객들은 돈을 그냥 창 밖으로 던져 버리더라고요.  제가 뭐 제 사적인 의견을 고객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취향이라는 건 다 다르쟎습니까... (중략)"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지." 스티븐이 말했다.

 

루소는 그대로 자기 말을 계속 했다.  "제가 뭐 황제의 식탁같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신사분들을 속이지 않아요.  그저 정직한 중산층 요리일 뿐이라구요.  하지만 그 씨베 드 라뼁(Civet de lapin: 레드 와인으로 만든 토끼 스튜, 역주)의 맛은 정말 !... (중략)"

 

"자, 그럼 마담 르이듀 네로 주문을 보내겠네." 스티븐이 말했다.  "우유, 부드러운 빵, 커피, 그리고 크롸상일세.  그리고 특히 커피는 진하게 끓여달라고 부탁해주게."

 

커피가 왔고, 맛을 보니 주문대로 진했다.  뜨겁고, 진했고, 아주 놀랍도록 향기로왔다.  크롸상은 기름졌으나, 너무 기름지지도 않았다.  아주 정말 멋진 아침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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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 위의 대화는 어디서 이루어진 대화였을까요 ?  이 글의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로로 잡힌 영국 해군 장교들과 프랑스 간수 사이의 대화입니다.  전쟁 포로가 파리 시내의 식당에서 요리를 시켜 먹는다 ?  그럼 돈은 누가 냈을까요 ?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먹을 사람이 내야지요.  따라서 똑같은 포로라고 해도, 돈이 있는 장교와 돈이 없는 장교는 생활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Surgeon's Mate' 편에서도, 간수가 처음에는 교도소 식사(prison ration)를 하시겠냐, 외부에 시켜드시겠냐고 묻습니다.  포로로 잡힌 일행 중 야기엘로 대위는 돈이 없었던 관계로, '난 교도소 식사를 먹어보겠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스티븐이 대신 밥값을 내주지요.   

 

당시 장교들이 불편하고 지루한 포로생활을 면하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1. 가석방 (parole)

 

당시는 아직 18세기의 잔재가 진하게 남아있는, 즉 낭만이라는 것이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포로가 된 장교들에게는, 가석방 문서에 서명하라는 제안이 주어졌습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자기가 포로가 된 것을 인정하고, 탈출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이 문서에 서명하면, 그 장교는 감금되지도 않고, 감시도 붙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롭게 사는 거지요.  그러자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  예, 돈이 필요하지요.  돈이 없으면 감금생활이나 가석방 생활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  당시 분위기는 유전(有錢)품위 무전(無錢)망신이었습니다. 

대신 그 문서에 서명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혹은 포로 교환이 이루어져 석방될 때까지는 몹시 지루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전쟁이 근 2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히 서명할 문제는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이런 가석방 제도는 귀족 장교들이 편하게 포로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 포로 교환

 

당시에는 적군끼리도 정기적으로 연락장교들이 만나서 포로들의 편지도 교환하고 양쪽 군 지휘관끼리의 공식 문서도 주고 받았습니다.  이때 교환되는 문서 중의 하나가, 양쪽이 서로 붙잡고 있는 포로들의 명단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서로 교환할 만한 장교의 이름을 발견하면 '맞바꾸자'라는 제안이 오고 갔습니다.  물론 상응할 만한 계급끼리 교환이 이루어졌지요.  그렇다고 이런 교환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고, 특정인물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거나 또는 악질적인 전범인 경우에는 이런 교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1803년 짧은 휴전 뒤에 다시 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국에 대해 철천지 원수같은 앙심을 품고 있어서, 영국과는 포로 교환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이런저런 피치못할 사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붙잡더라도, 제대로 포로를 후방으로 후송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 장교에게 일종의 '가불' 포로 교환이 제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포로 교환 조건에 따라 먼저 풀어주는 거지요.  대신 가석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식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 전쟁에서 적국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상대방이 신사라는 것을 믿고, 상대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장교들 이야기입니다.  졸병들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건 사실 포로가 되기 전, 아군 장교들에게서도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까 뭐 별로 다를 바도 없었겠지요.  가장 참혹한 대접을 받은 졸병 포로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뒤퐁 휘하에 있다가 포로가 되어 억류된 약 2만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디즈 항구의 낡은 선박들에 수용되어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가 많은 수가 병과 굶주림, 폭동 등으로 죽었고, 그러고도 살아 남은 병사 중 7천명은 결국 지중해 내의 무인도인 카브레 (Cabrera) 섬에 수용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수용이 아니라 그냥 무인도에 버리고 간 셈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거의 전국토를 프랑스군에게 유린당한 상태라서 포로들에 대한 배급은 커녕 자기 군대조차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이들에 대한 보급은 잊을 만 하면 가끔씩 가서 밀가루 몇 통을 바닷가에 투척하고 가는 정도였고, 이 섬의 프랑스 포로들은 자기들끼리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 섬에서는 식인 사건까지도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들이 구조된 것은 반 이상의 포로들이 죽은 뒤인 1814년 7월 6일이 되어서였습니다.  무려 4년이 넘는 무인도의 기아 생활을 한 뒤였지요.  이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C. S. Forester의 걸작 소설 시리즈인 '혼블로워' 중 짧은 단편인 'HORNBLOWER'S CHARITABLE OFFERING'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대탈주'처럼, 포로로 있다가 탈출하여 영웅 대접을 받은 경우가 있었을까요 ?  예,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그랜트(Colquhoun Grant)라는 영국군 장교였습니다. 

 

이 양반은 EO(Exploring Officer)라고 해서, 정찰 장교였습니다.  EO라는 일을 하는 장교는, 요즘으로 따지면 고공 정찰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즉, 적의 후방 지역을 말을 타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단, 적의 후방이라고 해도, 반드시 군복 정복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붙잡혔을 때 스파이로서 교수형을 당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군복을 입고도 적의 후방에서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빠른 말이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현대전에서도 정찰기가 적 후방에서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속도로 고공 비행을 해야 하지요 ?  이런 EO들은, 건초를 먹여서 키우지 않고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만 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곡물을 먹여서 키운 말이 스태미너가 훨씬 좋았나 봅니다.  대개의 기병대원들이 타는 말은 아무래도 값이 싼 풀을 먹었는데, 이런 말들은 곡물을 먹고 자란 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랜트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했는데, 탁월한 기민함과 과감성으로 프랑스군 점령 지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프랑스군의 움직임 파악이나 스페인 빨치산과의 연락 등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그랜트가 유명해진 사건은, 그랜트의 말이 결국 실수를 하여 프랑스군에 체포되었던 건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랜트는 뭐 그렇게 나쁜 대우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간에 영국 군복을 입은 장교였으므로, 그랜트는 포로가 된 장교로서 괜찮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랜트는 프랑스로 압송된 이후, 파리에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영국군 군복을 입은 채로, 파리 시내를 몇 주동안 태연히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호텔에도 투숙하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요.  그의 군복이 영국군 전통의 붉은 코트인 것을 보고 의심스러워 하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저는 미국군 장교입니다' 라고 뻥을 치고 돌아다녔는데, 이게 아주 잘 먹혔다고 합니다.  1812년 발발한 미국과 영국간의 전쟁 때문에,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 관계였거든요. 

 

결국 항구도시인 낭트까지 흘러들어온 그랜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인 선장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전쟁 상태였지만, 같은 앵글로 색슨족인데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로 인해, 당시에도 개인들 간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랜트에 대해서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하즈웰(Jock Haswell)이라는 사람이 1969년에 'The First Respectable Spy' 라는 제목으로 이 사람에 대한 책을 썼다는데, 전 못 읽었습니다.  Sharpe 시리즈의 작가인 Bernard Cornwell은 읽은 모양입니다.  샤프의 성격이나 모험 중 상당 부분은 이 그랜트의 이야기로부터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출처: http://nasica1.tistory.com/53 [Nasica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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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북한군일화] 1. 미 24사 사단장 딘의 포로생활을 통해 본 인권옹호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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